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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_주의


알마 출판사의 #해시태그 시리즈는 특정한 키워드를 통해 사회를 읽어내는 책이다. 첫 번째 해시태그는 ‘#혐오_주의’라고 한다. 작년 12월에 나온 책인데, 좋아하는 교수님이 강의 교재로 쓰신다기에 친구에게 빌려 읽어보게 되었다. 혐오 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총 다섯 분의 짧은 글들을 묶어낸 아주 얇고 가벼운 책. 책 사이즈 자체도 별로 크지 않아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지만 담아내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에서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혐오, 여성혐오 등을 문화적 시각으로 읽어내고, 이러한 혐오표현의 법적 처벌 문제에 대해서까지 다룬다. 나는 <순수함에의 의지와 정치혐오>와 <대중문화에서 여성혐오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특히 위근우 기자님의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글투가 맘에 쏙 들었다. 아마 정치혐오는 시의성 있는 문제고, 여성혐오는 저에게 있어 실제로 피부에 와닿는 문제라 재밌게 읽혔나보다. 딸바보 라는 말 뒤에 숨어있는 은연중의 권위와 혐오에 대해 읽었을 때에는 무릎을 탁 쳤다. 내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웃자고 만들어 놓은 예능프로그램들을 보며 나만 웃지 못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이 불편함의 원인도 알게 되었다. 혐오는 왜 나쁜가? 이것을 생각해나가다 보면 혐오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혐오는 ‘증상symptom‘이다. 증상을 관찰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거기에 함몰되어선 곤란하다. 우리는 혐오를 사회악으로 지목할 게 아니라 혐오를 만들어내는 매커니즘을 찾아내야 한다. 촛불화 과정은 모든 정치적 참여가 촛불집회와 같은 패배에 직면할 것이라는 저주가 아니다. 차라리 압도적 스펙터클과 열광 앞에 불가능할 것이 없을 것처럼 보였던 시민의 힘이 너무나 쉽게 좌절되고 무시된 상황이 만들어낸 깊은 상처와 패배감을 말한다. 그럼에도 촛불집회라는 집회의 이데아, 즉 비폭력-평화집회의 추구와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민주주의라는 ‘절대선‘의 가치가 만들어낸 역할 사이에서 주저하며 스스로 고립되는 반복적 실패와 그것의 내면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촛불이 이룩한 모종의 성공과 실패가 시민사회의 곳곳에 상속되어 2008년 이후의 정치혐오를 잉태했다. 촛불화 과정은 행위자의 합리성과 순수성, 그리고 정의감에 기댐으로써 정치의 본질, 즉 대화와 타협을 통한 최적의 이익 재분배라는 원칙 자체를 부정하며 대의정치의 원칙이 설 자리를 몰수했다. 이때 일베 이용자들이 말하는 평범함이란, 평범함이 불가능해진 사회라는 역설을 표상한다. 평범함은 하나의 유토피아가 되어, ˝금전적으로 부족하지 않게 살고˝ ˝평화롭게, 사회에서 튀지는 않지만˝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삶을 회구한다. ‘평범한 사회구성원‘인 한국의 남성 시민은 자체로 가부장주의와 산업화를 동시에 구축하는 하나의 전형을 이룬다는 점에서, 평범함을 향한 일베 이용자들의 열망은 산업화 이래 국가가 산출해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국민상을 투영하고 있다. <아빠 어디가> 시즌1에는 한 명의 여자 아이에 네 명의 남자 아이가 출연한다. 프로그램은 똑똑한 오빠인 김민국과 친구 같은 오빠 후, 잘생긴 오빠 준, 장난꾸러기 동생 준수 등 각 남자 아이들과 로맨스 관계를 설정한다. 이러한 이성애 중심주의적 구도에서 아버지의 사랑은 매우 맹목적인 독점 관계로 이어진다. <아빠 어디가> 시즌1에서 아들과 함께 출연한 성동일은 부모와 일찍 헤어져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탓에 아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이 시대의 가장‘을 연기했다. 아들과의 사이에서는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전통적 아버지상을 구현하던 그는 ‘장남‘인 일곱 살 아들에게 자신이 없으면 어머니와 여동생은 모두 네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반복한다. 남성에게는 나이에 상관없이 보호자로서의 과업이 주어지는 것이다. 반면 시즌2에 함께 출연한 다섯 살 딸에게는 ˝여자답게 굴어라˝ ˝조신하게 앉아라˝ ˝여자애가 그게 뭐냐˝는 말을 반복한다. 프로그램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딸바보‘로 포장하면서 씩씩한 어린아이에게 ‘여성‘의 젠더를 부여한다. 아내가 앉았던 자리에 딸을 앉히고 아내와 먹었던 음식을 먹고 아내와 나눈 대화를 복기하면서 아버지는 아내를 딸로 대체한다. 이 장면은 성동일이 딸과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눈 날로 기록되며 감동적으로 채색된다. 그러나 여기서 딸은 아내를 대신하여 성애화된다. 이처럼 딸은 인간이기 이전에 ‘여자‘로 정체화되고, 이는 성인인 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 이 방송에서 아버지와 딸은 ‘데이트‘를 반복하며 소통을 시작한다. 그러나 정작 중심이 되는 것은 아버지의 구미에 맞추는 딸의 모습이다. 송재숙은 한국사회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을 코드화하는 방식에 대해 분석하면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미성년으로 취급된다고 지적한다. 여성은 결혼하기 전까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결혼 후에는 남편의 아래로 들어간다. ‘미혼‘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문화에서 ‘딸바보‘를 부모의 ‘사랑‘으로 유통시키는 것은 여성의 유아화에 다름 아니다. 여성은 독립적인 인간이 아니라 ‘딸바보‘나 ‘사랑꾼‘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즉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비주체의 자리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아버지가 딸을 보호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호자로서의 아버지를 강조함으로써 국가는 시민을 정치경제적으로 보호할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따라서 보호하는 남성성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여성은 보호받은 적이 없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소라넷 문제를 묘사한다는 건, 의도가 무엇이든 소라넷에서 벌어진 강간 모의와 리벤지 포르노 공유가 여성에게 얼마나 공포인지 인지하지 못했다는 걸 증명할 뿐이다. 이것이 소라넷에 대한 경계의 의도로 읽히길 바란다면, 그게 무능이다. 농촌 청년 기사 역시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비혼이 늘어난다는 것과 농촌 총각이 결혼을 못 한다는 것, 두 개 팩트의 시간적인 인접성을 논리적 인과로 이해 혹은 포장했다가 벌어진 참사다. 비윤리적이기 이전에 비논리적이며, 악의적이기 이전에 못쓴 기사다. ‘개저씨‘라는 표현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냐는 문제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언어로 이 질서에 균열을 내는 건 그래서 유의미하다. 갓 입사한 젊은 여성처럼 육체적으로 사회적으로 만만한 대상만 골라 한 줌 권력을 행사하는 건, 남자다움도 뭣도 아닌 그냥 개 같은 거다. 일상에 만연한 폭력을, 두려움의 시선이 아닌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기울어진 질서는 아주 조금 균형을 맞춘다. (…) 그러니 지금, ‘개저씨‘라는 말에 세상이 무너져라 분노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개저씨‘라는 표현이 사라질 미래를 향한 아주 작은 시작일 뿐이니까. 매우 많은 경우 포르노그래피 유무는 노출이 아닌 시선을 통해 결정된다. 해당 앵글이 드러내는 것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훑는 철저히 남성중심적인 시선이다. 시선은 권력이다. 불미스러운 일을 통해서야 배움을 얻는 건 슬픈 일이지만, 불미스러운 일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한다면 화나는 일이다.
#해시태그
알마 해시태그 시리즈는 사회를 잇고 모으는 연결고리입니다. 소셜 키워드를 통해 사회 현상을 읽고 지금 바로 여기, 그리고 미래를 탐구합니다. 그 첫 번째 키워드는 ‘혐오’입니다.

혐오는 왜 나쁜가?
지금 가장 정치적인 것은 여기에 있다.

혐오는 왜 나쁜가? 이것을 생각해 나가다보면 혐오가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혐오는 ‘증상(symptom)’이다. 증상을 관찰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거기에 함몰되어선 곤란하다. 우리는 혐오를 사회악으로 지목할 게 아니라 혐오를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찾아내야 한다. _박권일, 「혐오는_원인이_아니라_증상이다」 중에서

‘김치녀’ ‘맘충’이란 단어가 유행하자, 곧 이에 대적할 만한 혐오표현인 ‘개저씨’와 ‘한남충’이 등장했다. 그간 남성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을 ‘미러링’하여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주겠다는 ‘메갈리아’라는 인터넷사이트를 두고 남성들은 ‘남성혐오’라고 분노했다. ‘헬조선’이라고 자조하며 사회 자체를 혐오하는 청년들을 향해 장년층은 젊어서 그런 고생도 견디지 못하냐며 혀를 찬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광화문 광장에 매일같이 모여 나라를 망친 장본인들을 향해 촛불을 들고서 정치를 혐오한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혐오’란 감정이 난무한다. 사실 굳이 혐오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는 감정까지 ‘혐오’라는 단어를 빌릴 정도다. 그러나 단순히 이 국가를 ‘혐오사회’라고 단정 짓고 끝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제는 현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혐오의 ‘결’을 들여다보고, 그 ‘혐오’의 감정과 마주할 때다. 알마 해시태그 시리즈의 첫 시작인 #혐오_주의 는 사회학자 박권일의 혐오의 메커니즘을 찾아보는 「#혐오는_원인이_아니라_증상이다」를 시작으로, 진보와 보수 가리지 않고 존재하는 정치혐오를 ‘촛불집회’라는 코드로 해석해보는 김학준의 「#순수함에의_의지와_정치혐오」, 그리고 여성혐오와 메갈리아의 언어를 살펴보는 여성학자 허윤의 「#지금_가장_정치적인_것은_여성적인_것이다」와 대중문화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여성혐오를 꼬집는 대중문화기자 위근우의 「#대중문화에서_여성혐오는_어떻게_작동하는가」, 마지막으로 이러한 혐오표현을 법적으로 제재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법학자 이준일의 「#혐오표현을_법으로_처벌할_수_있을까?」등으로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는 코드 중 하나인 ‘혐오’의 다양한 결을 파헤쳐본다.


#혐오는_원인이_아니라_증상이다 박권일 _7
#순수함에의_의지와_정치혐오 김학준 _35
#지금_가장_정치적인_것은_여성적인_것이다 허윤 _73
#대중문화에서_여성혐오는_어떻게_작동하는가 위근우 _111
#혐오표현을_법으로_처벌할_수_있을까? 이준일 _155